곡성군 입면 제월리에 위치한 심해섭씨 가옥은 섬진강을 반달꼴로 끼고 돌면서 멀리 광주 무등산까지 100리가 거침없이 바라보이는 좋은 자리에 위치한다. 마을 이름은 예전에는 군지촌이라 하였으나 요즘은 그냥 군촌이라고 부른다. 흔히 이 가옥은 사랑채의 이름을 따서 군지촌정사( 池村精舍)라 한다. 정사(精舍)란 일반적으로 주택을 교육용으로 이용한 개인적인 서재나 사숙(私塾)을 말한다. 이 건물은 조선 중종 38년(1543)에 심광정(沈光亭)이 후학을 위해 건립하였으며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1백여m 가량 떨어진 곳에 함허정(涵虛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함허정은 경치가 좋아 옥과현감 등이 향음례(鄕飮禮)를 베풀던 곳으로 정자 밑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수목이 울창하여 지방유림들의 학문과 풍류가 어우러졌던 곳이다. 이 집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된 기와집으로 조선중기 사대부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을 지녔다. 사랑채인 군지촌정사와 행랑채는 당시의 건물이 약간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정면으로 보아 4칸이며 一자형으로 건물의 앞·뒤로 툇마루를 두었고 오른편 2칸의 상부에는 도장방과 작은 방을 두었으며 하부에는 대청을 각각 배치하였다. 건물의 맨 우측칸 하부에 조그만 퇴(退)를 달아 내어 가묘(家廟)를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동쪽의 대청 앞은 다른 칸과는 달리 머름과 관장문을 달아 동선과 시선을 차단하였는데 이는 가묘 앞의 대청이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므로 폐쇄성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안채에 축을 맞춘 마당 앞에는 5칸의 행랑채가 배치되었다. 원래는 맨 우측으로부터 대문 드들방아실, 허청, 도장, 뒷간의 순서로 배열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파손되고 복구하는 과정에서 맨 우측으로부터 허청, 도장, 대문, 드들방아실, 뒷간으로 순서를 바꾸었다. 군지촌정사라고 이름하는 사랑채는 3칸 전후툇집으로 서쪽에서부터 사랑아랫방, 사랑윗방, 대청이 배치되었다. 전후퇴는 모두 마루가 깔리고 대청은 3면으로 개방되었다. 사랑윗방에서 대청으로 향하는 문은 들어열개문으로 설치하며 내·외부공간의 교류와 조화를 꾀하였다. 흔히 들어열개문은 사대부집에 설치되며 여름에 문을 들이밀어 서까래에 걸치기 때문에 바람이 잘 통해 시원하고 멀리 까지 볼 수 있어 개방성이 강한 문을 말한다. |